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= [[민주당(미국)|민주당]] === 1924년 대선에서 무려 103번(...)이나 전당대회 표결을 거치며 당내 좌우파, 금주법 찬성-반대파, 도시-농촌파의 분열을 겪으며 본선에서 참패하고 만 [[민주당(미국)|민주당]]은 1928년 대선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. 현직 쿨리지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았던데다, [[허버트 후버]]는 1차 대전 때의 명성도 있고, 기본적으로 당내 구보수파(Old Right)에 속했지만 쿨리지나 하딩에 비해 더욱 중도적인 성향을 보여 유권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. 그래서 1924년 대선에서 유력한 프론트러너였던 [[윌리엄 깁스 매커두]] 전 재무장관 등은 1928년 대선에서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였다. 민주당에서 출마를 선언한, 그나마 대통령감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인사는 [[앨 스미스]] 뉴욕주지사와 [[코델 헐]] 테네시주 상원의원, 월터 프랭클린 조지(Walter F. George) 조지아주 상원의원 정도 뿐이었다. 코델 헐과 월터 F. 조지 역시 앨 스미스의 저명도에는 비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[[앨 스미스]]는 다른 모든 후보를 제치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849.67표를 획득, 52.50표를 얻은 월터 조지와 50.83를 얻은 코델 헐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1차 투표만에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앨 스미스 FDR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앨 스미스(왼쪽)와 프랭클린 루스벨트(오른쪽)''' || [[앨 스미스]]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주였던 뉴욕주의 주지사를 오래 지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.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소수 그룹에 속하는 '''[[아일랜드계 미국인|아일랜드계]] [[가톨릭|가톨릭교도]]'''였고[* 아일랜드인이나 폴란드인 등은 "하얀 흑인"이라 불리며 다른 유색인종 못지 않은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.] 금주법에 반대하여 민주당의 일부 파벌을 소외시켰다. 스미스는 이를 타계하기 위해 남부 출신의 상원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자 했는데 최종적으로 물망에 오른 것은 [[조지프 T. 로빈슨]](Joseph T. Robinson) 아칸소주 상원의원과 [[앨번 W. 바클리]] 켄터키주 상원의원이었다. 이중 스미스는 자신과 달리 금주법에 찬성하는 조지프 로빈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, 남부의 지지도를 유지하고자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